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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운영정보/사기탐구

신라 사기꾼 김태렴, 이해관계가 맞으면 사기를 쳐도 또는 당해도 모른 척한다

by 라 lahh 2023. 3. 21.

통일신라시대 왕자를 사칭했던 김태렴에 대한 이야기다. 일본에서는 아직까지 진짜 왕자로 여기고 있다는

 

통일신라시대 신라왕자라 하던 신라상인 

서기 752년 대마도 앞에 있는 일본 후쿠오카에 700여 명의 대규모 신라 사절단 7척의 배에 나눠타고 입항한다. 이들은 긴 여정을 거쳐 3개월 후 일본 수도 나라(현 오사카 근처)에 있는 여자황제 고켄을 만난다. 이 상단의 우두머리 김태렴은 황제에게 신라에서 가져온 특산물을 고켄에게 바치며, 자신은 신라의 왕자인데 왕의 명을 받아 왔다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한마디 더 신라가 일본에게 조공을 바치겠다는 이야기를 한다.

 

신라가 일본에 '조공'을 하겠다는 말이 나왔던 이유

한반도에 있던 통일신라는 일본을 신경쓰지도 않았고 가끔 이용해 먹는 존재였다. 고구려랑 전쟁할 때는 배후가 싸해질 수 있으니 그 때는 잘해주고 통일 후에는 바로 무시했다. 

그런데 그 즈음 일본의 왕은 스스로를 천황이라 칭했다. 천황이라는 말은 중국 외에 사용하지 않았는데 신라에서는 굳이 중국을 자극할 필요가 없었기에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전쟁 안나는 섬나라 일본의 왕은 스스로 천자라 칭하고 중국과는 동급으로 신라는 하대하고 싶어 했다. 

당시 한중일 관계를 잠시 들여다 보면 신라는 통일 직후 당나라와 긴장 관계였다. 그래서 일본과 친해지려 물건도 보내 주며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신라와 당나라의 불화가 잦아드니 신라는 일본을 바로 하대한다. 일본은 당나라와 동급은 아니더라도 소제국을 꿈꾸던 시절이라 신라의 윗급, 적어도 동급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신라가 외교 문서로 천황에게 ‘자네’라는 표현까지 써대니 어찌할바를 모르고 있던 시절이었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신라는 몇차례 사신을 일본에 보내긴 하지만 일본수도 ’ 나라’까지는 못 가고 일본 관문 다자이후에서 돌아오곤 했다. 이런 일본이 고울 리 없던 신라는 김태렴이 일본을 방문하기 10년 전인 742년에는 일본의 사신을 쫓아내 버렸다.  

 

당시 일본에서는 교역이 필요했다.

대항해 시대가 아닌 실크로드의 시기였던 그 때 신라 장사꾼들은 일본과 교역을 정식으로 하기 어려웠다. 일본에서는 법으로 향을 비치하라고 사찰에 지시했는데 일본내에서 생산할 수 없었다. 향, 불경, 인삼 등을 중국이나 아라비아에서 수입을 해야 했지만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아 물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신라상인들은 육로를 통해 물건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서로 교역하기엔 좋은 조건이었다. 신라 장사꾼들이 고민했던 포인트다.

 

최초의 여황제 코켄의 정치적 상황 

한편 여황제 고켄은 동생들을 제치고 황제가 되었기에 대외적으로 내세울 만한 뭔가가 필요했던 시기다. 그런데 때마침 신라왕자라 하는 김태렴이 나타나 조공을 하겠다고 하니 넋이 나가 버렸다. 황제라 불러 주고 조공까지 해 준다하니 얼마나 신났겠는가? 사기를 칠 때, 아니 장사할 때는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짚어 줘야 하는 것을 김태렴은 알고 있었다. '언니 너무 이뻐요~'

 

 

고켄
고켄 (재위기간 749~758)(764~770)




넋이 나간 고켄은 김태렴과 그 일행에게 큰 잔치를 베풀어 주고 필요한 것이 있냐고 물었다. 김태렴은 천황에게 조공을 바치고 남은 물건이 있으니 필요하다면 일본 귀족들이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청원을 한다. 어려울 것도 없는 부탁이라 천황은 바로 들어 준다. 이때 일본 귀족들이 필요하다고 작성한 문서가 '매신라물해'로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런데 여기서 김태렴은 자신이 신라의 왕자라는 소개만 했을 뿐 공식적인 외교 문서같은 것이 없었다. 고켄은 김태렴을 돌려보내면서 앞으로는 신라국왕이 직접 일본 방문을 하던지 사람을 보낸다면 반드시 외교문서를 가지고 오라고 당부한다. 가지고 온 물건 다 판 김태렴은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는 말을 남긴 후 황제의 배려로 일본을 여유롭게 유람하다 신라로 돌아갔다. 끝.

 

이후의 일, 고켄은 신라에게 조공을 왜 안바치냐고 따짐

김태렴은 곧 공식문서를 들고 다시 일본으로 오겠다고 약속하고 일본을 떠났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듬해 신라사신과 조공을 기다리던 고켄은 기다리지 못하고 신라에 왜 조공을 왜 안 바치냐고 사신을 보냈다. 상황을 모르고 있던 신라 경덕왕은 일본 사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뭣 때문에 일본사신이 저러는지도 몰랐을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경덕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삼국유사에서는 오랫동안 왕자가 태어나지 않아 왕후와 이혼하고 만월부인을 새로 들이는데 그 마저도 힘들어 김태렴이 일본에 신라왕자라고 자처하며, 일본에 방문했던 6년 후에나 왕자가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태렴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게된 천황과 귀족들은 7년 후인 759년 발해와 연합해 배 500척으로 신라를 침공하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발해는 신라와 친해졌고 별 이득도 없어 전쟁에 협조하지 않고, 선덕왕 때 일본 단독으로 공격했다 대파당했던 경험이 있던 지라 분만 삭히다가 흐지부지 된다.

 

장보고 청해진 탄생의 배경이 되는 사건


이후 김태렴의 일로 일본과의 관계가 극단에 이르지만 신라가 전하는 귀한 물건 맛을 본 일본은 신라 상인들과의 민간 교역을 막지 않았다. 이후 828년 청해진이 설치되고 해상왕 장보고의 통제 아래 당, 신라, 일본을 잇는 민간 교역망이 활성화 되는 계기는 이 사기극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김태렴의 일화는 일본의 속일본기에만 기록이 있고, 우리에게는 기록이 없어 김태렴을 진골 정도의 신라 귀족으로 추정하고 있다. 진골이니 경덕왕의 직계는 아니더라도 신라왕실과 관련 있는 고위급 집안이었던 정도로 추정하는데 70여척의 상단을 꾸릴 정도면 그 업계에서 거물급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 위키피디아에서는 아직도 김태렴을 신라 왕자로 기술하고 있고, 사기꾼이라는 것은 일부 학자의 설로 취급하고 있는 중에 있다. 

그렇다고 유명한 인물은 아니었던지 신라가 망할 때까지 신라는 김태렴의 존재를 몰랐고 속일본기가 한국에 소개되기까지 천년 이상 흐르는 동안에도 몰랐으니 이 사기극은 성공한 사기극이 분명할 듯하다. 

 

이 사기극을 요약하면
'서로 이해관계가 맞으면 사기를 쳐도, 또는 당해도 모른 척한다'

 

 

이글은 '직썰'에 투고했던 글인데 다시 정리하여 올림